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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 Volume 12(1); 2008 > Article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2008;12(1): 89-112.
A Critical Review on the Issue of Proto-Nationalism during Late Chosŏn
Tae-yong Huh
Lecturer, Ewha Womans University
허태용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Keywords: Nationalism, Sin Ch΄aeho, Koguryŏ, Parhae, Sinocentrism

국문초록
조선후기, 특히 18세기 후반 이종휘와 유득공이 고구려, 발해 중심의 자국사 인식을 강화시켜 나간 맥락은 기존의 연구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20세기 초 민족주의 역사가인 신채호의 인식과 바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겉모습은 유사하지만 이종휘와 유득공으로 대표되는 18세기 후반 북방 고대사인식이 딛고 있던 역사적인 맥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명청교체를 통해서 형성되어나간 ‘중화회복의식’과 ‘중화계승의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명나라가 이미 망한 이후의 변화된 동아시아질서 속에서도 명의 부활을 고대하던 인식이었던 ‘중화회복의식’은 강경한 경우 ‘북벌론’으로 구현되기도 하였지만 명의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공유되면서는 조선을 그 후계자로서 규정짓는 ‘중화계승의식’으로 이어졌고 이는 변화된 상황 속에서도 기존 관념을 포기하지 않으려던 보수적인 생존의 방식이었다. 고구려와 발해에 관한 역사인식이 강화된 것은 이런 맥락 속에서 가능하였다. 원래 고구려는 중국 중심의 화이질서 속에서 안주하지 못하고 교만하게 武를 숭상하다가 天子에 의해 멸망한 反面敎師의 대상으로 주로 인식되었었는데 국가의 보전이 장담되지 못하는 임진왜란의 전란 속에서 고구려는 오히려 본받아야 할 자랑스러운 과거로 재해석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특히 이전에는 부끄럽게 여겼던 중국과의 전쟁은 조선의 강함을 역사적으로 증명해주는 사건으로 재해석되었고 안시성 전투 등은 고구려의 강력함을 보여주는 사건일뿐 아니라 그 후계자인 조선의 강력함을 증명하는 역사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임진왜란을 통해 새롭게 강화된 고구려사 인식은 ‘북벌론’의 논의 속에서 그 의미가 더욱 강화될 수 있었다. ‘수?당과 같은 거대한 제국과 맞섰던 고구려’는 ‘강력한 청에 맞설 수 있는 조선’을 상정하는 데 바로 이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중화회복론자’들인 송시열과 윤휴 같은 인물들이 고구려를 기억하면서 ‘북벌’을 주장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가능했다. 이후로 고구려는 중화질서의 관점에서 새롭게 평가되기 시작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허목이 고구려를 ‘기자의 나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명나라가 회복될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나타난 ‘중화계승의식’ 역시 고구려에 관한 역사인식을 강화하는데 기여하고 있었다. 조선이 ‘중화의 유일한 계승자’가 되기 위해서 가장 강조한 실체는 기자였는데 기자에 관한 인식의 강화는 자연스럽게 기자조선의 강역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하였고 이는 만주, 요동일대의 지리적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중화의 유일한 계승자’로서 기자를 계승하는 것은 그 문명뿐 아니라 영토까지를 함께 계승하는 것이 되어야 했으며 결국은 기자를 뒤이어 그 지역을 소유했던 고구려와 발해에 대한 관심의 증가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종휘, 유득공, 신경준과 같이 기존에는 ‘실학자’의 범주에서 이해되었던 인물들은 이 시기 고구려와 발해를 기자의 후예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었고 그들의 이런 역사인식이 〈東史〉와 〈渤海考〉로 체계화되었다. 요컨대 18세기 후반 북방고대사인식의 강화는 임진왜란ㆍ병자호란 및 명청교체 이후 형성된 ‘중화의식’의 맥락 속에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보다 잘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기존의 이해방식과는 구별되는 결론이지만 그렇다고 신채호의 역사인식과 18세기 후반의 역사인식이 무관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18세기 후반까지 강화되었던 고구려, 발해 중심의 자국사 인식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강력한 쇄국의 입장을 견지하였던 李恒老에게서 다시 나타났는데 강력한 무력의 서구국가들에게 대항할 수 있다는 논리를 만드는 데 수ㆍ당을 물리쳤던 고구려에 관한 기억이 또다시 유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고구려 중심의 자국사 인식이 늘 동일한 모습으로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처한 상황에 따라 소멸과 재생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신채호 단계에 이르러서 고구려 중심의 자국사 인식이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조선후기 이래 고구려 중심의 자국사 인식이 역사적 상황에 따라 ‘斷續’의 형태로나마 후대에 ‘전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신채호의 ‘민족주의 역사학’이라는 완성점을 설정하고 18세기 후반의 역사인식이 줄기차게 ‘완성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는 설명은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제어: 민족주의, 신채호, 고구려, 발해, 중화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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