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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 Volume 9(1); 2005 > Article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2005;9(1): 195-236.
The Formation and Evolution of the Koguryŏ-centric Perception of the International Order
Hirokata Shinohara
Visiting Fellow, Institute of Korean Culture, Korea University
條原啓方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Keywords: Koguryos perception of the international order, Koguryocentric world order, King Kwanggaet

국문초록
고구려 금석문자료에는 고구려 고유의 군주호인 太王이 등장한다. 이 태왕은 고국원왕부터 평원왕(재위 559~590)까지 사용되었으며, 동시기(5호16국시대) 화북에서 전개했던 胡族 군주들의 天王호와 유사한 배경에서 등장하였다. 태왕호는 4세기 이후 고구려 군주가 <天의 혈통적 계승자>로서 서서히 관념적으로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서 군주의 절대성을 나타내기 위해 창출된 칭호로서 미천왕의 후손에게 대대로 계승되었다. 태왕의 절대성을 나타내는 天은 두 가지 관념으로 설명된다. 하나는 고구려의 전통적인 <하늘>신앙으로 이를 통해 고구려는 부여와 北燕에 대해 우위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또 하나는 유가사상의 天子 개념에서 차용된 것으로 고구려는 그 개념의 일부인 “朝貢”을 통해 전통적 <하늘>을 공유하지 않은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이 “天”은 고구려 내에서 한자로 표기됨으로써 전통적 관념과 외래적 개념을 나타낼 수 있는 다양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이러한 天 관념의 다양성은 이 시기 고구려가 직면해 있던 현실 변화의 산물이었다. 4세기 초부터 고구려는 대외적인 영역확장, 그리고 외부에서 유입, 망명해 오는 집단의 수용을 통해 기존의 고유 사회체계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다양성을 지니게 되었다. 고구려는 樂浪·帶方 故地에서 亡命 漢族세력을 현지 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한편 기존 고구려 관인들에 대해서는 전통신앙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秩序認識을 공유하게 하여 고구려 중심의 국제질서를 誇示시켰다. 그리고 東西南北에 산재해 있는 周邊勢力에 대한 軍事的 優位를 확보하여 고구려를 정점으로 한 현실공간(天下)을 형성하였다. 이에 주변세력에 대한 고구려의 秩序認識을 중심으로 한 秩序世界가 확립되었다. 이것은 광개토왕대에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長壽王代가 되면 高句麗의 정책은 남북조에 대한 <朝貢과 冊封>이라는 외교관계로 변한다. 다만 조공은 기본적으로 臣從을 의미하는 외교형식으로서 자국을 정점으로 한 고구려의 질서인식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우므로 조공외교에서는 漢族·胡族 출신 관인을 起用하면서 전통신앙을 공유하는 高句麗 官人에게는 情報를 統制하면서 질서인식을 유지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게 일단 순조롭게 시작된 대남북조 외교도 北燕을 둘러싼 서로의 인식차이에서 대립으로 변하였다. 북연 天王인 풍홍은 북위에 대한 稱臣, 송의 책봉, 그리고 고구려의 질서인식에서도 하위에 자리매김된 존재였다. 고구려는 국내에서 공유되고 있는 질서인식을 유지하기 위해 그를 국내에서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 풍홍이 사망함으로써 남북 양조는 풍홍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을 잃게 되었고 세 나라의 충돌은 무산되었다. 이 사건은 고구려의 국제질서인식이 또 다른 질서인식과 처음으로 충돌한 것이었으며, 고구려는 그 해결에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였다. 5세기 후반 고구려는 북위에 대한 조공외교를 재개하였다. 북위는 고구려에 대해 대체로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장수왕의 죽음을 계기로 고구려에 世子 入朝를 요구하였다. 북위에는 주변국에 왕, 세자를 朝賀儀禮에 참석하게 함으로써 자신이 <華>임을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는데, 고구려의 입장에서 세자 입조는 그 질서인식의 정점에 있는 太王의 후계자가 직접 황제를 만나 군신관계를 맺는 것이 되므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고구려는 북위의 요구를 거절하는 대신 조공외교를 질·양적으로 향상시킴으로써 이를 회피하였으며, 평화적 외교통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에 고구 려의 성숙된 외교정책을 엿볼 수 있다. 4-5세기 고구려에 독자적인 질서인식을 형성, 추구할 수 있는 독창성이 존재했다는 점, 그리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질서인식과 대립하면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외교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등은 고구려사뿐만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민족사를 이해하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또 부족하나마 당시 多元的이고 重層的인 동아시아 질서가 관념세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정치 운영 논리로서 기능했음을 지적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주제어: 고구려적 질서인식, 고구려적 질서세계, 광개토왕, 장수왕, 5호16국시대, 남북조, 책봉, 조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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