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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2012;17(2): 1-28. |
The Korean through a Prism of the Soviet-Japanese Relations(1920-1930) |
Zhanna G. Son |
Advisor, All-Russia Association of Korea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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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잔나 |
재러고려인협회 자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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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
After clearing of the Far East interventionist in 1922-1923 the main task of the young Soviet state was the establishment of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Moscow and Tokyo. Representatives of the USSR and Japan had been signed on January, 20th 1925 “the Convention on main principles of mutual relations between the USSR and Japan”. The memorandum of general Tanaka Giiti (on July, 25th, 1927) about bases of a policy in Manchuria and Mongolia predetermined aggressive plans of Japan not only these territories, but also Russia. Koreans in territory of the Soviet Far East have appeared “hostages” of two countries USSR and Japan. Changes in foreign policy between these countries directly were reflected in destiny of the Soviet Koreans. Since 1927 in Korea from the Japanese government repressions and persecutions in relation to Koreans have amplified. In USSR Koreans began to accuse of “the Japanese espionage”. Repressions have amplified in 1931-1932 and in 1937-1938. |
Keywords:
Soviet-Japanese relations, Korean people in the USSR, Comintern, political repres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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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
1922년 말 극동지역에서 제국주의간섭군들을 축출하고 난 이후 신생 소비에트러시아의 주요 과제는 일본과 외교적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25년 1월 20일 소련과 일본의 대표들은 “소련과 일본의 상호간 주요 원칙에 관한 조약”에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만주와 몽골에 관한 정책의 기초가 된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 장군의 상주문(上奏文)(1927. 7. 25)에 따르면, 일본은 이들 지역 뿐 아니라 러시아에 대한 공격적인 정책을 예정하고 있었다. 소련 극동지역의 한인들은 소련과 일본 양국의 ‘인질’이나 다름 없었다. 따라서 양국간 외교정책의 변화는 재소 한인들의 운명에 직접적으로 반영될 수 밖에 없었다. 1927년부터 한인에 대한 일본정부의 압박과 학대는 어둑 심해져 갔으며, 소련의 한인들은 ‘일본의 스파이’ 라는 혐의를 받기 시작했다. 이는 1931년과 1932년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으며, 1937년과 1938년의 한안 대숙청으로 나타났다. |
주제어:
소일관계, 재소 한인, 코민테른, 정치적 탄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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