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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2011;16(1): 81-113. |
The Formation and Transformation of the Awareness of a Common Cultural Identity in 19th Century Chosŏn |
Sung-san Cho |
HK Research Professor, Research Institute of Korean Studies, Korea Universi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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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산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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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
同文意識은 漢字를 공유한다는 의식으로서 그것의 기원은 『中庸』의 “書同文”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통일제국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일체화된 세계의 의미로서 주로 사용되었다. 書同文이 제국과 함께 출현하였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동문의식은 중국 밖의 동아시아 세계에서 주로 事大와 관련된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日本, 安南과의 소통과정에서 한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등장하면서 한자를 통한 하나의 문명권 의식도 점차 생겨났다. 이러한 의식은 18세기말에서부터 본격화되는 동문의식의 단서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18세기 말경의 四庫全書 편찬은 동문의식 형성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하였다. 명청교체를 통하여 중화 개념은 문화주의적 성격을 더욱 강하게 가졌다. 이것은 중화문명의 상징인 한자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사고전서는 천하의 모든 문헌을 수집, 정리한다는 측면에서 조선과 일본, 안남의 서책들도 일부 포함하였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청, 조선, 일본의 지식인들을 한자를 매개로 하나로 묶는 작업이 될 수 있었다. 특히 19세기 본격화되는 서양의 침입은 서양에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한자문명권을 상상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한자문명권 인식은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들어오면서 또 다른 모습으로 전환되었다. 서양에 대비되는 한자문명권 인식은 일본 제국주의 논리에 있어서 중요한 바탕이 되어갔다. 한자문명권 인식의 배경에는 한자와 유교를 보편문명 그 자체로서 사유하고 이를 공유하는 조선, 일본, 안남은 문명국이라는 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중국이 독점했던 중화문명이 조선, 일본, 베트남 등의 나라로 이양된 것이다. 따라서 모든 나라들은 자신들을 중화라고 자부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일본이 중화문명을 온전히 구현했다면 일본은 더 이상 夷狄이 아니라 중화문명국가라는 인식이 마련될 수 있었다. 大東學會의 東道西器論者들 일부가 일본과 결합할 수 있었던 것에는 이러한 논리가 있었다. 그들은 한자를 亞文, 즉 아시아의 글자라고 하면서 중국의 문자로서만 사유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자로부터 국적성을 탈각시키고 한, 중, 일 삼국이 공유하는 문자로서 한자를 상정하였다. 이것은 중세적 보편주의가 근대에 어떠한 방식으로 전환ㆍ변용되었는가를 보여주었다. |
Keywords:
awareness of a common cultural identity (同文意識, tongmun ŭisik), notion of writing with the same script (書同文), Chinese characters (漢字), Zhonghua (中華) civilization, change from the Ming to the Qing dynasties, Siku quanshu (四庫全書, Complete Library of the Four Treasuries), Toa (東亞, East Asia), Taedong hakhoe (大東學會, The Society of Great East Asian Learning), Theory of Tongdo sŏgi (東道西器, Eastern Way-Western Tech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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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
同文意識은 漢字를 공유한다는 의식으로서 그것의 기원은 『中庸』의 “書同文”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통일제국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일체화된 세계의 의미로서 주로 사용되었다. 書同文이 제국과 함께 출현하였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동문의식은 중국 밖의 동아시아 세계에서 주로 事大와 관련된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日本, 安南과의 소통과정에서 한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등장하면서 한자를 통한 하나의 문명권 의식도 점차 생겨났다. 이러한 의식은 18세기말에서부터 본격화되는 동문의식의 단서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18세기 말경의 四庫全書 편찬은 동문의식 형성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하였다. 명청교체를 통하여 중화 개념은 문화주의적 성격을 더욱 강하게 가졌다. 이것은 중화문명의 상징인 한자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사고전서는 천하의 모든 문헌을 수집, 정리한다는 측면에서 조선과 일본, 안남의 서책들도 일부 포함하였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청, 조선, 일본의 지식인들을 한자를 매개로 하나로 묶는 작업이 될 수 있었다. 특히 19세기 본격화되는 서양의 침입은 서양에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한자문명권을 상상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한자문명권 인식은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들어오면서 또 다른 모습으로 전환되었다. 서양에 대비되는 한자문명권 인식은 일본 제국주의 논리에 있어서 중요한 바탕이 되어갔다. 한자문명권 인식의 배경에는 한자와 유교를 보편문명 그 자체로서 사유하고 이를 공유하는 조선, 일본, 안남은 문명국이라는 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중국이 독점했던 중화문명이 조선, 일본, 베트남 등의 나라로 이양된 것이다. 따라서 모든 나라들은 자신들을 중화라고 자부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일본이 중화문명을 온전히 구현했다면 일본은 더 이상 夷狄이 아니라 중화문명국가라는 인식이 마련될 수 있었다. 大東學會의 東道西器論者들 일부가 일본과 결합할 수 있었던 것에는 이러한 논리가 있었다. 그들은 한자를 亞文, 즉 아시아의 글자라고 하면서 중국의 문자로서만 사유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자로부터 국적성을 탈각시키고 한, 중, 일 삼국이 공유하는 문자로서 한자를 상정하였다. 이것은 중세적 보편주의가 근대에 어떠한 방식으로 전환·변용되었는가를 보여주었다. |
주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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